사랑 한 조각

in #zzan4 years ago (edited)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많이 놀란 끝에 설이 다가오면서 심적 부담이
있었는지 몸에서 이상신호를 보냈다.

처음 결혼 했을 때 보다 음식 종류도 양도 많이 줄였지만 이제는 꾀가
나는지 몸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 식구들도 걱정이 되는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성화를 하며 마트에 가면 만두가 널렸으니 사먹으면 된다고
큰 소리를 친다.

그게 말이 쉽지 종가에서 자라온 내게 그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엄마는 늘 눈처럼 새하얀 행주치마를 입고 장독대로 우물가로 부엌으로
내달리며 잠시 앉아서 쉴 틈도 없이 사셨다.

하루 종일 상을 차리고 또 술을 거르고 떡 빚고 나물 기르시는 틈틈이
꽃을 심어 가꾸시며 밤이 되어서 겨우 방에 들어오시면 그것으로 일과를
마치고 쉬시는 게 아니었다. 늦은 밤 반짇고리를 내리고 화로에 인두를
꽂은 다음 바느질거리를 들고 등잔불 곁으로 다가 앉으셨다.

명절이 돌아오면 한 달 전부터 준비를 하셔야 했다. 문 바르고 도배하고
이부자리 빨아 손질하는 것부터 엿기름 기르고 시루에 나물거리 앉혀
햇빛 가려 기르는 일도 엄마 몫이었다. 그리고 나면 하루 종일 걸려 엿을
고았다. 과즐 다식 산자 같은 마른 제물 먼저 준비하고 나박김치를 담갔다.
명절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이 바로 나박김치 담그는
날과 다식 박는 날이었다.

하얀 무를 꺼내 나박나박 썰고 당근과 노란 생배추도 무와 잘 어울리게
썰었다. 조그만 시루에서 파릇파릇하게 올라오는 미나리도 윤기 흐르는
줄기로 썰어 넣고 생밤도 빠지지 않았다. 소금을 넣고 버무려 조그만
항아리에 담고 찹쌀풀에 고춧가루를 넣고 물을 맞춰 베보자기에 걸러 낸
빨간 물을 붓고 깨끗이 씻은 파뿌리와 파 마늘을 베주머니에 넣고 묶어두고
설날까지 기다리면 저절로 맛이 들었다.

나박김치 담그는 곁에서 달콤한 무쪽을 얻어먹기도 하고 특히 생밤을
먹는 재미도 있지만 마술사 같은 엄마의 손놀림을 구경하는 게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재미있었다.

떡국이나 다른 명절 음식을 먹을 때에도 나박김치는 꼭 따라왔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상에 가득해도 나박김치가 없으면 목에서 걸리는
것처럼 잘 넘어가지 않고 중요 한 게 빠진 느낌이었다.

몸 아픈 핑계로 음식도 줄이고 웬만한 떡도 사고 만두도 직접 빚는다는
집에서 사다 먹는데 입에 당기지도 않고 수저가 무겁다. 무엇보다 내가
거짓말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별로 먹지 않아도 속이 답답하니 무겁고
더부룩하다.

나박김치 한 탕기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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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드물 것 같습니다 ㅠㅠ 잘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4 years ago  Reveal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