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14, 중공군 참전이후 북한과 소련의 반응

in #sct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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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전역이후인 11월 14일 김일성, 슈티코프, 펑더화이는 회의에 참전했으며, 여기에서 펑더화이는 북한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이 더욱 긴밀하고 일치된 작전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과 김일성 슈티코프가 좀 더 자주만나야 한다는 희망을 표명했다. (박영실 106, 국편, 203-206)

슈티코프는 11월 21일 김일성을 방문하여 바실리에프가 소련으로 소환되고, 총군사고문으로 라주바예프가 도착할 소식을 알렸다.(국편, 215) 여기서 바실리예프와 라주바예프의 교체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련은 바실리예프가 작전지도를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문책성 인사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12월 1일 스탈린은 제1차 전역에서 중공군이 성공한 것에 대한 축하편지를 보냈다.

“소련군이 최고급으로 무장한 독일군과 작전을 전개하여 얻었던 현대전쟁의 풍부한 경험, 그리고 동시에 우수한 장비를 갖춘 현대화 군대로 변한 것과 똑같이 중국군대는 현대화되고 우수한 장비를 갖춘 미군과의 반격작전에서 틀림없이 현대전쟁의 풍부한 경험을 얻을 것이고 그들도 현대화되고 우수한 장비를 갖추고 강력한 위력을 보이는 군대로 장차 변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박영실 107, 심지화 107)

한편, 중국의 성과에 대한 북한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주체적으로 전쟁을 진행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950년 10월 21일 당 중앙위원회 3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현 정세와 당면과업”이라는 보고를 통해 “전쟁에서 승리하자면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하여야 하고, 누가 어떻게 도와주든지간에 우리 문제는 우리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며 자체의 힘으로 모든 애로와 난관을 극복하고 당 앞에 나선 당면한 혁명과업들을 성과적으로 수행해 나가지고 하였다.”(박영실 109, 박득준, 김정봉 편집, 조선통사, 하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7, 445)

이미 당시에 북한은 중국이 전쟁에 참여하고 나서 북한 내정에 간섭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기 시작했다.

모든 군사행동에는 분명한 목적을 설정한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시 군사적 목적을 어디까지로 설정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을 하지 않았다.

박영실은 마오쩌둥의 군사적 목적이 한반도 통일이라는 데이빗 쑤이의 주장을 정리했다. 중국의 군사적 목적에 대해서는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박영실, 109, 데이빗 쑤이,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 7, 개입결정의 실현, 전략연구, 통권 46호 2009,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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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전투 현대화 훈련장으로 삼았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