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의 수다#914] 히로시마성에서 축구장까지, 전쟁의 땅에 세워진 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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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성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거대한 축구 경기장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히로시마의 프로축구팀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홈구장인 에디온 피스 윙 히로시마(EDION PEACE WING HIROSHIMA)다. 2024년 2월 문을 연 비교적 새로운 경기장으로, 약 2만 8천 석 규모의 축구 전용구장이다.

히로시마에는 이전부터 대형 경기장이 있었지만, 육상 트랙이 함께 있는 종합경기장은 축구를 관람하기에는 경기장과 관중석 사이의 거리가 멀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축구에 집중할 수 있는 전용구장을 만들자는 요구가 오랫동안 이어졌고, 2013년에는 본격적인 검토협의회까지 만들어졌다. 이후 옛 히로시마 시민구장 부지, 히로시마 미나토공원, 중앙공원 등 여러 후보지를 놓고 오랜 논의가 이어졌다.

처음부터 지금의 위치가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옛 시민구장 부지와 미나토공원이 유력 후보로 검토됐지만 교통과 부지 활용, 주변 개발 등의 문제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고, 이후 중앙공원 광장이 새로운 후보지로 다시 떠올랐다. 결국 2019년 중앙공원 광장이 최종 건설지로 결정되면서 오랜 논의가 마무리됐다.

그런데 경기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파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역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과거 일본 육군 중국군관구 치중병 보충대가 있던 자리였고, 발굴 과정에서 당시 군사시설의 유구가 발견된 것이다. 군마가 사용하던 물마시는 시설과 세척장 등에 사용된 돌과 아스팔트 등이 확인됐으며, 일부 유구는 보존·전시되고 있다.

앞에서 히로시마성 주변에서 중국군관구사령부와 군사시설의 흔적을 보았다면, 이곳에서도 다시 일본군의 흔적을 만나게 되는 셈이다. 지금은 수만 명의 사람들이 축구를 보기 위해 모이는 현대적인 경기장이지만, 그 아래에는 전쟁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피스 윙(Peace Wing)’이라는 이름도 흥미롭다. 전쟁과 원폭의 기억이 남아 있는 히로시마에서 이제는 축구라는 평화로운 스포츠를 통해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히로시마시는 이 경기장을 단순한 축구장에 그치지 않고, 히로시마성에서 평화기념공원까지 이어지는 도심의 새로운 관광·문화 동선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함께 추진했다.

과거 군사시설이 있던 땅 위에 지금은 축구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인다. 히로시마성을 시작으로 호국신사와 전쟁의 흔적을 지나 이곳까지 걸어오면, 같은 공간이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